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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선교(남양만)
활빈교회는 전면철거령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판자촌 내에 조직되어 있는 주민회를 소집, 두 가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첫째는 신도 중 서울에 남기를 원하는 철거민들이 공동으로 대지를 구입하여 연립주택을 세우자는 계획으로 '내 집 갖기 운동'을 하였습니다. 둘째는 철거민들 중 농촌에서 올라온 이농민들을 중심으로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개척단은 6명의 대표를 뽑아 1조는 휴전선 부근의 유휴지를, 3조는 경기도 남양만 간척지를 답사하고 귀농정착이 가능한 지 여부를 조사하였습니다. 현지답사 내용을 검토한 활빈교회는 남양만에 귀농정착할 것을 결정하였고 농수산부에 남양만 간척지의 농지 배정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끈질긴 교섭의 결과 농지배정을 허가받고, 1975년 말 선발대가 현지에 도착하여 기초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76년 동안 단계적으로 입주하여 소금 벌 위해 천막을 치고, 공동생활을 하며 정지작업과 소금기를 줄이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네 번의 모내기 끝에, 영농 첫해에 일반 논의 80%에 해당하는 수확을 거두는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 해 교회이자 마을회관인 '농민의 집'을 건축하였습니다. 남양만 간척지 9백 60만평의 새 농토에는, 입주 전부터 살고 있던 농어민 1천 1백세대, 간척지 조성공사에 품을 팔러 왔다가 눌러앉은 4백여세대, 새로 입주한 1천 3백 세대를 합하여 2천 8백여 세대로 15개 마을이 이루어졌습니다. 1976년 8월, 이화리에 교회이자 마을회관인 '농민의 집'을 건축한 활빈교회는 열 다섯개 마을 2천 8백 세대를 선교하는 계획을 세우고 각 지역별로 3백여 세대 당 7개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 하나씩 기도소를 세웁니다. 각 기도소별로 예배처소이자 마을 회관인 건물을 지었습니다. 1977년 4월 12일, 활빈교회는 '남양만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습니다. 1978년 10월, 활빈교회는 창립 7주년을 맞아 20세대 단위로 '활빈 두레마을'을 남양만 선교지역내에 설립키로 결의하고 그 기초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활빈두레는 활빈교회가 한국 농촌과 농촌교회의 어려운 여건을 감안하여 농촌부흥과 농촌선교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같은 협동농장을 한국 현실에 맞도록 새롭게 시도한 농장이었습니다. 1979년 4월, 활빈두레마을에 첫번째로 8세대가 입주함으로써 '1차 두레마을'이 시작되었고 그 해 육우를 수입하여 농가에 배분하였습니다. 1979년 10월, 호주에서 젖소 356마리와 종돈 92마리를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입과정에서의 착오로 사고가 발생하였고 활빈교횐느 최대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79년 11월, 활빈교회의 어려움으로 '활빈두레마을'이 해산되므로, 1차 공동체마을 설립사업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